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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유산] 김지남 묘

작성자 : 고양문화원 날짜 : 23/06/25 21:57 조회 : 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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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1호

지정일 : 2009. 8. 31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산195-5

 

 

김지남(1654∼?)은 조선 후기의 역관(譯官)이다.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계명(季明)이며 호는 광천(廣川)이다. 1671년(현종 12) 역과에 급제하고, 1682년(숙종 8) 역관으로 일본과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2년 부사로 연경에 가는 민취도(閔就道)의 역관으로 수행하였는데, 그의 권유로 자초법(煮硝法: 화약을 만드는 흙을 달이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랴오양(遼陽)의 어느 시골 집에 찾아들어가 사례금을 주고 그 방법을 배우던 중 갑자기 그 주인이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국법으로 엄금되었던 자초법을 알아내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으나, 이듬해 다시 진하사(進賀使)일행으로 청나라에 갔으며, 그뒤에도 역관으로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되풀이하여 물어 결국 그 방법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1694년 이를 실험한 결과 성공하였으나, 그를 지원하던 민취도가 평안도관찰사로 전근되어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하였다.1698년 병기창고 도제조 남구만(南九萬)의 지시에 따라 자초법에 따라 화약을 제조하였으며, 그 성과가 매우 크자 숙종의 윤허를 얻어 그 제조법을 수록한 《신전자초방 新傳煮硝方》을 저술하여 군기시에서 간행, 반포하였는데, 1796년 정조에 의해 자초법이 금석(金石)과 같은 성헌(成憲)이라고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숙종이 중직을 제수하려 하였으나, 벼슬의 귀중함을 들어 역관에게 동서반 실직(實職)을 제수함은 부당하다는 양사(兩司)의 반대로 문성첨사(文城僉使)의 외직에 임명되었다. 1712년 청나라와 국경선을 확정짓기 위해 양국대표가 회동하는데, 아들 경문(慶門)과 함께 수행하여 청나라 대표 목극등(穆克登)을 상대로 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문사(文詞)와 중국어에 유창하여 1714년에는 역관으로 사신을 수행하면서 보고들은 사실들을 참고로 하여 사대와 교린의 외교에 관한 연혁·역사·행사·제도 등을 체계화한 《통문관지 通文館志》를 아들과 함께 편찬하였다.이는 당시 외교에 종사하던 중신(重臣)·사절·역관 등 실무진의 편람(便覽) 및 사서(辭書)의 구실을 하는 필수서가 되었고, 국내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에까지 유포되어 그곳 외교관에게도 우리나라에 관한 지침서가 되었다.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저서로 《신전자초방》·《동사록》이 있고, 편서로는 《통문관지》가 있다.

 

삼송신도시로 개발중인 오금동 하촌마을에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사대부 묘역임. 이 일대에 우봉김씨 묘역 수십기가 자리해 있으며 이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조 숙종대의 역관인 김지남의 묘소임.

현재 김지남의 묘역에는 비갈이 1기 세워져 있음. 비갈의 내용 중 김지남이 숙종대에 백두산에 올라 중국 청나라 사신들과 담판을 져서 그 영토를 명확히 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음.

왕조실록과 같은 문헌기록에는 백두산 정계비와 관련한 기록을 다수 볼 수 있으나 무덤의 비석중 정계비를 세웠다는 내용은 매우 드문 예임.

 

묘갈은 영조 11년(1735년)에 제작되었으며, 재질은 대리석이다. 내용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사실이 적시되어 있고 글씨체가 뚜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