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의 충실한 문화지킴이 고양문화원
[향토유산] 국사봉 지석묘군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6호 지정일 : 2010. 6. 15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267공 /덕양구 화정동 148-53공 국사봉의 정상부에는 장사바위라고 불리는 큰 바위가 있고 아래로 20~30m 정도 능선까지 많은 바위들이 산재하고 있다. 정상부를 기준으로 남쪽사면은 국사봉에서 굴러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 많고 북쪽사면에는 수적으로는 많지 않은 것 같으나 잘 다듬어 진 돌이 20여개 분포하고 있다. 정상부에 있는 장사바위는 직경 10m도 넘는 큰 바위였다고 하나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일부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 정도로 엄청나게 큰 바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일대의 바위들은 다른데서 옮겨온 것이 아니라 지상에 노출된 노반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대부분이며 지석묘를 썼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노반을 이용해서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대학교박물관, 1991, 『고양군화정지구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
2023/06/25, 고양문화원
[향토유산] 황윤길 묘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5호 지정일 : 2009. 8. 31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72-15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길재(吉哉). 호는 우송당(友松堂)이다.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563년 정언, 1567년 지평이 되었다. 1585년(선조 18) 황주(黃州)목사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1590년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접견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장차 일본이 반드시 내침(來侵)할 것이므로 대비하여야 할 것이라고 복명하였다. 이때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의 보고와 서로 상반되었으나, 조정은 동인(東人) 세력이 강성하였으므로 서인인 그의 의견을 묵살하였다. 1592년 봄 그의 예견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그의 말을 좇지 않았음을 후회하였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이 발발된 1592년에 우송당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때 조성되었을 것이나 전란 중에 석물을 설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추정할 때 약 400여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석물의 재질은 화강석이며 상석 앞의 향로석은 제례를 위하여 1982년 설치한 것이다. 비석 및 비문은 전하는 것이 없어 왕조실록과 징비록 등 고문서를 참고하여 1982년 후손들이 행적위주로 작성하여 건립하였다
[향토유산] 이유청 묘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4호 지정일 : 2009. 8. 31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844-3임 ★ 12世 諱 惟淸(韓原君)公 1459~1531 목은선생의 5대손이며 참찬(參贊) 諱 훈(塤) 안소공(安昭公)의 아들인 諱 惟淸(韓原君)公은 1486年 (성종 17)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持平), 장령(掌令등을 역임하고 1498年 연산군 무오사화(戊午士禍)때에 집의(執義)로서 김종직(金宗直)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반대했다가 삭주(朔州)에 流配된 후, 3년 만에 풀려나왔다. 그러나 곧 이은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삭직(削職)되었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 (1504)으로 재 등용되어 집의동부승지(執義同副承旨)등을 지내었다. 중종 2년(1507) 정난공신(定難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고 그 후 우부승지(右副承旨),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대사헌(大司憲), 호조참판(戶曹參判)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중종 3년(1508) 功臣에 오르지 못한 신복의(辛服義)의 역모사건에 연루 강진(康津)에 유배되었다가 1511년 좌참찬(左參贊)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중심인물이 되어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등을 肅淸하여 한원군(韓原君)에 봉해졌다. 그 후 등극사(登極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중종 18년(1523)에 左議政이 되어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하였으며 중종 23년(1528)에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어 궤장(机杖)을 하사받았다. 시호는 공희(恭僖)이다. 묘는 도내동 은못이 마을의 한산이씨묘역에 위치하며 貞敬夫人 慶州 李氏의 묘와 합부되어 있다. 묘소에는 상석, 고석, 향로석, 장명등, 문인석 2쌍이 있다. 문인석은 봉분 앞쪽에 작은 것을 배치했다. 장명등의 크기는 총 높이 204cm, 지붕 너비 88cm이다. 봉분 앞에는 2기의 묘표가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근래에 다시 세운 것이며 옛 묘표에는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兼領經筵監 春秋館事 世子傅 韓原君 李公之墓’라 기록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180×45×19cm이며, 받침은 40×90×53cm이다. 상석은 6.25때 한쪽이 깨어져 새것으로 교체하였다. 깨어진 상석은 묘의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크기는 20×160×97cm이다.
[향토유산] 이천서씨 묘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3호 지정일 : 2009. 8. 31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844-3임 정부인 이천서씨는 망월암 이축의 부인이다. 묘는 도내동 한산이씨묘역의 이축의 묘와 떨어진 곳에 따로 자리 잡고 있다. 이훈 부조지묘 바로 뒤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6각의 봉분 조임석이 2단으로 설치되어 있다. 6기의 조임석 크기는 312(하나의 조임석은 두 개의 석재가 이어져 있음)×30cm이다. 묘 앞에는 문인석 1쌍, 상석, 최근에 만들어진 향로석이 갖추어져 있다. 문인석의 크기는 143×42×34cm 이고 상석은 141×90×20cm이다. 묘비는 6.25때 깨어져 1957년에 다시 세웠다. 묘소는 모두 한산이씨 광목공파 소유이며, 이축선생묘소와 은지는 이미 향토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소의 남쪽으로는 주택가와 공장이 약간 위치하고 북쪽으로는 군부대가 위치하나 대부분 농지이다. 하지만 화정신도시와 매우 가까워 인근에 신도시가 형성될 가능성이 있다.
[향토유산] 신원동 덕명교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2호 지정일 : 2009. 8. 31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98-2 규모는 총 높이 286cm, 비신 가로 95cm, 두께 25cm이며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대좌의 거의 전부가 땅에 묻혀있는데 비 전체의 재질은 화강석이며 옥개석의 일부는 마모되어 있는 상태이다. 비의 앞면에는 전자(篆字)로 ‘경기도 고양군 덕명교’라 기록되어 있다. 앞면에는 전자 이외에도 가는 글씨로 된 비문이 전면(全面)에 새겨져 있다. 비의 뒷면에도 비의 중간 부분부터 비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고양 신원 덕명교량명’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수십 명의 인명이 이두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 비의 내용은 한양과 북부 지방을 연결하는 관서로(關西路) 구간 중 신원동 곡릉천 위에 다리를 놓으면서 그 자세한 사항을 기록으로 표기해 둔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이 비의 건립자는 이한(李瀚)과 당시 고양 군수인 통정대부 유후성(通政大夫 柳後聖), 그리고 정헌 대부 윤면지(正憲大夫 尹勉之), 이상식(李尙植), 홍시우(洪時雨)를 대표로 한 760여 명의 주민으로 되어 있다. 즉 앞면은 비의 서문으로 주민 760여 명이 모두 힘을 합쳐 곡릉천 위에 돌다리를 건립했고 그 명단을 자세하게 표기해 둔 것이다. 신원동 해방촌 마을의 중소기업은행 축구연습장 안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비는 대좌의 거의 전부가 땅에 묻혀 있는데 비 전체의 재질은 화강석이며 옥개석의 일부는 마모되어 있는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