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의 충실한 문화지킴이 고양문화원
[향토유산] 강지선생묘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27호 지정일 : 1989. 10. 23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산79-1(임), 128-5(대) 조선조 전기의 무신으로 단종 원년(1453)에 출생하여 중종 12년(1517) 6월 30일에 돌아갔다. 자는 덕윤(德潤) 호는 모암(慕庵)이며 영선군(永善君)에 봉해졌고 본관은 진주(晋州). 통계공(通溪公) 회중(淮中)의 증손으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절충장군(折衝將軍)이며 죽은 후 국왕으로부터 예장(禮葬)의 은덕(恩德)을 입었다. 시호는 소청(昭淸). 묘는 오금동 하촌마을에서 상촌마을로 이어진 마을길 우측에 위치하며 봉분 옆으로 1959년 봄에 세운 오석의 신도비가 있으며 비문에는 金潤東 幷書로 되어 있다. 묘에 세워져 있는 비에는 ‘靖國功臣 永善君 姜漬墓’라 기록되어 있다. 당대에 세워진 석물로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있으며 사자 2마리가 받치고 있는 장명등 등은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묘를 중심으로 중앙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및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이 있다.
2023/06/25, 고양문화원
[향토유산] 박충원묘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26호 지정일 : 1986.6.16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산26-1(임) 박충원(1507~1581)은 조선 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仲初이며 호는 駱村, 본관은 密陽이다. 고양 팔현의 한 사람인 복재 기준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寧越郡守, 春秋館編修官, 成川府使 등의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오석의 묘표는 1958년에 건립되었고 광해군 9년(1617) 2월에 건립된 구신도비는 대리석으로 되었으며 규모는 높이 180㎝, 너비 56㎝, 두께 27.2㎝이다. 그리고 오석의 새로 세운 신도비는 정조 19년(1795)에 세운 것으로 비의 머리 부분과 대좌를 갖추고 있다. 크기는 높이 297㎝, 너비 117㎝, 두께 52㎝이다. 묘소에는 묘표, 상석, 장명등 및 동자석과 문인석 각 1쌍이 있다. 묘는 주교동 밀양박씨묘역에 위치하며 정경부인 星山 李氏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향토유산] 한규설선생묘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25호 지정일 : 1986.6.16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산90-1(임) 한규설은 조선조 후기의 정치가로 자는 순우(純佑) 본관은 청주(淸州)로 어영대장(御營大將) 총융사(摠戎使) 규직(圭稷)의 동생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뒤 형조,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포도대장을 역임하고 1905년 의정부참정(議政府參政)으로 내각을 조직하였다. 이해 11월 9일 일제의 전권대사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임권조(林權助) 공사와 군대를 시위케 하고 을사조약 체결을 강행할 때 그 부당성을 주장하여 끝까지 반대, 조약 체결 후 파면되었다. 그 후 고향에 돌아 갔다가 뒤에 중추원 고문, 궁내부 특진관(宮內府 特進官)을 역임, 한일합방 때 일본정부에 의해 남작(男爵)이 수여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1930년 돌아갔다. 묘는 원흥동 웃말에 위치하여 정경부인 밀양 박씨(密陽朴氏)와 합장되어 있다. 묘 앞 우측에는 옥개를 갖춘 높이 190cm, 폭 50cm, 두께 25cm의 오석 묘표와 망주석, 상석, 석양 등이 있다. 1934년 10월 아들 양호(亮鎬)가 세운 묘비의 높이는 146cm, 폭 50cm, 두께 20cm의 규모이다.
[향토유산] 김홍집선생묘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24호 지정일 : 1986.6.16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26-1(임) 김홍집은 고종 5년(1867) 문과에 급제하여 1880년 예조참의로서 수신사(修信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고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소개하여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한 공으로 예조참판에 승진했으나 개화를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배척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사직했다. 고종 19년(1882)에 구미열강이 통상요구와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뒷처리 등 복잡한 국제문제에 부딪친 정부에 다시 기용되어 한미, 한영 등 조약체결의 부사(副使), 1882년에는 이유원(李裕元)과 함께 조선전권(朝鮮全權)으로 일본과 제물포 조약 체결의 부관으로 외교수완을 발휘, 경기도 관찰사로 승진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우의정, 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한 뒤 사임했다. 묘소에는 최근 새로 만들어진 묘갈,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1쌍이 있다. 묘는 대자동 대자골에 위치하여 배(配) 정경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묘가 부좌(祔左)되어 있다. 현재 봉분의 총 둘레는 15m인데 원래 이 묘는 1975년 6월 11일 파주에서 이곳으로 천묘한 것이다. 묘갈(墓碣)이 봉분 우측에 세워져 있다. 옥개석이 있는 비의 비문은 후손 정록(正祿)이 쓰고 세운 것이다. 김홍집(1842~1896)은 조선후기의 정치가로 처음 이름은 宏集이며 자는 敬能, 호는 道園, 본관은 경주이다.
[향토유산] 기응세선생묘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23호 지정일 : 1986.6.16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산48(임) 기응세(1539~1585)는 조선 시대 중기의 문신·효자로서 자는 景遇, 고양팔현의 한 사람인 服齋 奇遵의 손자이며 한성판윤 奇大恒의 아들, 영의정 奇自獻의 아버지로 본관은 幸州이다. 평소 효행이 있어 조선 선조 조에 정려를 내렸고 삼강록에 책록되었다. 좌·우의 문인석은 얼굴표정이 독특하고 비교적 세밀히 조각 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그 가치가 높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묘는 성사동 사근절 마을에 위치하며 善山 林氏와 쌍분으로 되어 있다. 봉분 바로 앞의 대리석 묘비는 선조 19년(1586)에 세운 것으로 높이 120㎝, 너비 40㎝, 두께 18㎝의 규모이다. 묘비 앞쪽에는 장명등의 옥개석만이 도궤된 채 남아있다. 묘 앞에는 2기의 묘비와 상석, 향로석 그리고 좌우에 망주석, 문인석 각 1쌍씩 배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