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의 충실한 문화지킴이 고양문화원
[향토유산] 김전선생묘 및 신도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12호 지정일 : 1986.6.16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산40-1(임) 김전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조 4년 (1458)에 출생하여 중종 18년(1523)에 돌아갔다. 자는 중륜(仲倫)이며 호는 난헌(嬾軒)․능인(能人),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우신(金友臣)의 아들이며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증조가 된다. 중종 9년(1514) 대사헌(大司憲), 이어 좌찬성을 거쳐 중종 13년 찬집청당상(撰集廳堂士)으로 [속동문선(續東文選)]을 왕에게 찬진(撰進)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켰고 이어 우의정이 되었으며 중종 15년에 영의정(領議政) 겸 세자사(世子師)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정(忠貞). 묘는 원흥동 송현마을 원흥교회 뒤편 절골 골짜기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상석에는 광무 10년(1906) 새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묘소의 우측, 망주석 뒤편의 신도비는 장방형의 화강암 비좌, 비신과 화강암의 이수를 갖추었는데 ‘金忠貞公神道碑’란 전자가 뚜렷하다. 특히 비의 이수 부분 문양과 조각수법은 매우 뛰어나며 비의 이수는 생동감 넘치는 조각기술을 보여주는 우수한 신도비문이다.
2023/06/25, 고양문화원
[향토유산] 정지운선생묘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11호 지정일 : 1986.6.16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 산172-12(임) 묘는 현재 대규모의 아파트단지가 건설된 안곡초등학교 뒤쪽인 고봉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貞夫人 忠州 安氏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묘 앞에는 모두 3기의 묘비와 함께 상석, 향로석 및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이 배치되어 있다. 명종 17년(1562) 5월에 건립한 묘갈에는 ‘秋巒居士鄭之雲之墓’라 새겨져 있는데 비문은 퇴계 이황이 찬하고 송인이 서하였다. 1981년 2월에 건립한 2기의 묘비는 오석 비신에 화강암 이수를 갖추었다. 정지운(1509~1561)은 조선시대 중기 성리학자로서 고양팔현 중의 한사람이다. ★ 정지운 [鄭之雲, 1509~1561] 본관 경주(慶州). 자 정이(靜而). 호 추만(秋巒). 경기도 고양(高陽) 출생.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어 조화(造化)의 이(理)를 규명한 뒤, 이황(李滉)을 만나 1553년(명종 8) 수정을 받았으며, 이것이 뒷날 사칠논쟁(四七論爭)의 발단이 되었다. 마음이 곧아 남과의 교제에도 퍽 신중하였으며, 벼슬에 천거되었어도 사양하였다. 1561년 천마산(天摩山)에 유람을 갔다가 병이 나서 고향으로 되돌아오다 죽었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에 배향되었다.
[향토유산] 김명원선생묘 및 신도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10호 지정일 : 1986.6.16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산71-1(임) 묘는 관산동 경주김씨묘역에 西向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貞敬夫人 淸州韓氏의 묘와 雙墳을 이루고 있다. 묘 봉분 100m앞에 위치한 신도비는 숙종 21년 5월에 건립한 것으로 장방형 비좌(碑座)와 옥개(屋蓋)를 갖추었다. 비의 앞면에는 ‘평란공신 좌의정 경림부원군 증시충익 김공신도비명․(平難功臣左議政慶林府院君贈諡忠翼金公神道碑銘)’이라 전자(篆字)되어 있다. 비문은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김종연(金宗衍)이 썼으며 김창협(金昌協)이 전(篆) 하였다. 김명원(1534~1602)은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字는 應順, 號는 酒隱이며 본관은 慶州로서 關察使 金萬鈞의 아들이다. 退溪 李滉의 문인으로 明宗 13년(1588) 司馬試에 합격하고 3년 뒤 式年文科에 甲科로 급제하였다.선조 2년(1569) 鍾城府使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고 선조 20년(1587) 左參贊으로 知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 선조 22년 (1588) 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수습하는데 공을 세워 平難功臣 3등에 올라 慶林君에 봉해졌다. 좌찬성,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고 선조 33년(1600) 부원군에 진봉되어 좌의정에 올랐다. 유학에 조예가 깊고 병서, 궁마에도 능하였으며, 시호는 忠翼이다
[향토유산] 이무선생묘 및 신도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9호 지정일 : 1986. 6. 16 소재지 : 덕양구 주교동 산75(임) 이무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敦夫이며 호는 中亭이다. 본관은 丹陽으로, 판서 李居敬의 아들이다. 조선 개국 후 開城尹, 都體察使, 參贊門下府使, 判三軍府事, 右政丞, 領丞樞府事, 右政丞 兼 判兵曹判事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 2년(1402)에는 金士衡, 李회와 함께 지리적 지식을 수집하여 세계 최초의 세계지도인 『混一疆理歷代國之圖』를 제작하여 세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그후 태종 8년(1408)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민무구의 옥사에 연루되어 창원에 유배되었다가 竹州로 이배 도중 괴한들에 의하여 피살 당하였다. 뒤에 伸寃 되었으며 시호는 翼平이다 묘는 貞敬夫人 尹氏가 합폄되어 있으며 주교동 원당중학교 뒤편의 영글이산기슭에 위치한다.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 해평 윤씨(海平尹氏)와 계배(繼配) 정경부인(貞敬夫人) 능성 구씨(綾城具氏)가 합폄(合窆)되어 있는 사각묘(四角墓)로 석대(石帶)가 돌려져 있다. 신도비 옆에는 1976년에 후손들이 건립한 永慕碑가 있는데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다. .
[향토유산] 민순선샘묘 및 신도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8호 지정일 : 1986. 6. 16 소재지 : 고양시 덕양구 현천동 산19(임) 민순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문봉서원(文峰書院)에 제향된 고양팔현(高陽八賢)의 한 사람이다. 중종 14년(1519)에 출생하여 선조 24년(1591)에 돌아갔다. 자는 경초(景初), 호는 행촌(杏村), 또는 습정(習靜)으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처음에는 낙봉 신광한(申光漢)에게 글을 배운 뒤 화담 서경덕을 찾아가 그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향시(鄕試)에 장원을 하였으며 선조 초 효행으로 조정에 알려져 효릉 참봉(孝陵參奉)으로 발탁되었다. 그 뒤 공조정랑(工曹正郞), 예빈시정(禮賓寺正), 통례원 예통(通禮院禮通) 등에 임명 되었으나 학문에 정진할 수 없다하여 모두 사퇴하고 향리에서 후진 교육과 학문 연구에만 전심하였다. 특히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장사랑공(將仕郞公)이 창병(瘡病)을 앓자 밤낮으로 간호하며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상을 당하여 예를 준수하므로 보는 이마다 감동하여 시복(試服)하였다고 한다. 75세를 일기로 행주리(杏州里) 자택에서 돌아갔으며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과 고양(高陽) 문봉서원(文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행촌집(杏村集)]이 있다. 현천동 거무내 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배(配) 숙인 평양 조씨(淑人平壤趙氏)와 숙인 전주 이씨(淑人全州李氏)가 함께 3기(基)의 봉분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민순의 봉분 앞에는 ‘통훈대부통례원 우통례 습정선생 민공지묘(通訓大夫通禮院右通禮習靜先生閔公之墓)’라고 쓰여진 묘비가 있으며 우측에 오석(烏石)의 묘표(墓表)가 1983년 9월 18일 종중(宗中)에 의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