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의 충실한 문화지킴이 고양문화원
[향토유산] 북한산 3․1 운동 암각문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2호 지정일 : 1993. 4. 19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 1-1(임) 이 암각문은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봉(白雲峰) 정상의 화강암 바위에 새겨져 있다. 기록문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인 정재용(鄭在鎔)이 3․1운동(運動)의 역사적 사실을 후게(後世)에 전(傳)하기 위하여 평평한 바위 위에 ‘경천애인(敬天愛人)’이란 네 글자를 세기고, 그 안에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은 기미년(己未年) 2월 10일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하였으며 3월 1일 탑동공원(塔洞公園)에서 자신이 독립선언(獨立宣言) 만세를 도창(導唱)했다.”는 내용이 정자체(正字體)로 새겨져 있다. 이 글을 새긴 시기 및 그 목적에 관하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3․1운동 이후로 추정되며 그 목적은 거족적 독립만세 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글을 새긴 정재용(鄭在鎔)은 1886년 해주(海州)에서 출생(出生)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19년 2월 19일 해주에서 상경(上京)하여 3․1운동 전날밤 서울역에서 100장의 독립선언서를 원산교회로 송달하고 남은 한 장을 가지고 있다가 탑동공원(塔洞公園)에서 이를 낭독하여 3․1운동의 불을 당겼던 장본인이다. 그후 해주(海州)로 귀향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20년 1월 20일 일제(日帝)에의해 검거되어 2년 6개월의 형을 언도받고 평양(平壤)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76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듬해인 1977년 건국포장과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2023/06/25, 고양문화원
[향토유산] 류겸선생묘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1호 지정일 :1991. 6. 25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산106-8(임) 류겸은 고려 공민왕 5년(1357)에 태어나 조선 태종 11년(1411)에 돌아간 문신이다. 고려 우왕 6년(1380)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태종 10년(1410)에 형조참의(形曹參議)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으며 세종조에 청백리로 녹선(錄選)된 인물로 원래 이 묘소는 화전(花田)에 있었으나 1937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한 것이라 한다. 묘소 앞에 있는 석물로는 ‘통정대부 보문각 직제학 청백리 유겸묘 숙부인 충주최씨 부좌(通政大夫寶文閣直提學淸白吏柳兼墓淑夫人忠州崔氏祔左)’라 쓰인 묘비와 상석, 향로석 등이 갖추어져 있다. 특히 묘비를 갖추고 있는 귀부와 망주석, 문인석은 조선 중․후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봉분 바로 앞의 묘비는 높이 103cm, 폭 36cm, 두께 12cm의 규모이다. 또 문인석은 섬세한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며 인체의 비례감각이 상당히 뛰어나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및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 1쌍이 있다. 묘는 행신동 무원마을의 진주류씨묘역에 위치하며 忠州 崔氏의 묘와 합장되어 있다. 원래는 花田에 있었으나 1937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한 것이라 한다.
[향토유산] 류구선생묘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0호 지정일 :1991. 6. 25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산106-8(임) 유구는 고려 충숙왕 3년(1335)에 태어나 조선 태조 7년(1398)에 돌아갔다. 조선조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서 진산군(晋山君)에 책봉되었으며 세종대에 청백리로 추록되었다. 현재 이곳의 진주유씨 묘소 가운데 가장 전대(前代)에 해당하는 인물로 시호는 정평공(靖平公)이다 묘는 행신동 무원마을 진주 류씨 묘역내에 위치하며 부인 德水 李氏의 묘와 합장되어 있다. 특히 고졸한 글씨체로 ‘大學士 柳가塋’이라고 쓰인 표석과 소박한 조각법의 합장한 석인은 다른 분묘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것으로 원래부터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와 다른 석물 중의 일부는 조선 중기 이후의 양식을 보여주고 이다. 이 중 돌장승과 같은 문인석 석물은 두 손을 앞으로 모은 특이한 모습이다. 묘 앞에는 상석, 묘표 및 문인석과 석인 1쌍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이중 석물 일부는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향토유산] 류림선생묘 및 신도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29호 지정일 :1991. 6. 25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산106-8(임) 류림은 조선조 중기의 무신 인조 21년(1643)에 돌아갔다. 자는 여온(汝溫)이며 본관은 진주로 공조판서 진동(辰仝)의 손자이다. 선조 36년(1603)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병마절도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등을 지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성을 굳게 수비하여 침입한 청군의 공격을 무사히 넘겼다. 강화에서 남하하는 적을 크게 무찔러 전공을 세웠다. 청국과의 화의가 성립된 후 다시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부임하였으며 청나라의 요청으로 명나라 군대를 격퇴하였다. 그 전공으로 심양으로부터 초청장이 왔으나 이를 거절하여 오히려 백마성(白馬城)에 유배, 안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조 16년(1638) 풀려나와 이듬해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되었다. 인조 19년(1641) 청국이 명나라를 토벌할 때 또다시 그들의 요처에 따라 영병장(領兵將)으로 출정했으나 몸이 불편하다는 구실로 참전하지 않았다. 돌아간 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묘는 행신동 번데뫼 마을에 위치하며 배(配) 증정경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묘와 합장되어 있다. 묘소 아래 100m 지점에는 숙종 21년(1695) 8월에 건립된 신도비가 남아 있다. 신도비에는 옥개석이 갖추어져 있고, 비문은 남구만(南九萬)이 짓고 글씨는 아들 지발(之發)이 썼으며 전은 홍수주(洪受疇)가 하였다. 묘 앞에는 높이 127㎝, 너비 52㎝, 두께 22㎝의 묘비가 있다. 신도비에는 옥개석이 갖추어져 있는데 높이 240㎝, 너비 91㎝, 두께 34㎝ 이다.
[향토유산] 류진동선생묘 및 신도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28호 지정일 :1991. 6. 25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산106-8(임) 류진동은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연산군 3년(1497)에 출생하여 명종 16년(1561)에 돌아갔다. 자는 숙춘(叔春), 호는 죽당(竹堂) 본관은 진주(晋州)로 한평(漢平)의 아들이다. 중종 17년(1522) 사마시를 거쳐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중종 33년(1538) 정언(正言)을 지냈으며 이어 지평(持平), 교리(校理), 장령(掌令)을 두루 역임한 후 중종 38(1543) 부제학(副提學)에 올랐다. 전라, 경기, 평안도의 외직을 맡고 명종 5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4년 뒤 대사헌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때 경연(經筵)에서 주역을 진강(進講)하게 되었는데 그가 적임자라 하여 경연관(經筵官)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이어 공조판서에 이르렀고 명종 14년(1559)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고 이어 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중풍으로 곧 돌아갔다. 문사에 뛰어났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일설에는 남대문의 현판 ‘숭례문(崇禮門)’을 썼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시호는 정민(貞敏). 묘는 행신동 무원 마을 진주 류씨 묘역 공원내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대리석의 묘표에는 ‘資憲大夫 工曹判書 兼同知春秋館事 五衛都摠府摠管 柳辰仝墓’라 기록되어 있다. 비문 측면 내용에 의하면 이 비는 명종 17년(1562)에 세운 것이다. 묘아래 50m 지점에는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는 명종 18년(1563)에 건립된 신도비가 있는데 옥개석이 건조되어 있다. 묘의 봉분 주위에는 상석, 장명등과 문인석, 망주석 각 1쌍이 배치되어 있고 상석 뒤편에는 대리석 재질의 묘표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