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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유산] 김지남 묘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1호 지정일 : 2009. 8. 31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산195-5 김지남(1654∼?)은 조선 후기의 역관(譯官)이다.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계명(季明)이며 호는 광천(廣川)이다. 1671년(현종 12) 역과에 급제하고, 1682년(숙종 8) 역관으로 일본과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2년 부사로 연경에 가는 민취도(閔就道)의 역관으로 수행하였는데, 그의 권유로 자초법(煮硝法: 화약을 만드는 흙을 달이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랴오양(遼陽)의 어느 시골 집에 찾아들어가 사례금을 주고 그 방법을 배우던 중 갑자기 그 주인이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국법으로 엄금되었던 자초법을 알아내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으나, 이듬해 다시 진하사(進賀使)일행으로 청나라에 갔으며, 그뒤에도 역관으로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되풀이하여 물어 결국 그 방법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1694년 이를 실험한 결과 성공하였으나, 그를 지원하던 민취도가 평안도관찰사로 전근되어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하였다.1698년 병기창고 도제조 남구만(南九萬)의 지시에 따라 자초법에 따라 화약을 제조하였으며, 그 성과가 매우 크자 숙종의 윤허를 얻어 그 제조법을 수록한 《신전자초방 新傳煮硝方》을 저술하여 군기시에서 간행, 반포하였는데, 1796년 정조에 의해 자초법이 금석(金石)과 같은 성헌(成憲)이라고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숙종이 중직을 제수하려 하였으나, 벼슬의 귀중함을 들어 역관에게 동서반 실직(實職)을 제수함은 부당하다는 양사(兩司)의 반대로 문성첨사(文城僉使)의 외직에 임명되었다. 1712년 청나라와 국경선을 확정짓기 위해 양국대표가 회동하는데, 아들 경문(慶門)과 함께 수행하여 청나라 대표 목극등(穆克登)을 상대로 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문사(文詞)와 중국어에 유창하여 1714년에는 역관으로 사신을 수행하면서 보고들은 사실들을 참고로 하여 사대와 교린의 외교에 관한 연혁·역사·행사·제도 등을 체계화한 《통문관지 通文館志》를 아들과 함께 편찬하였다.이는 당시 외교에 종사하던 중신(重臣)·사절·역관 등 실무진의 편람(便覽) 및 사서(辭書)의 구실을 하는 필수서가 되었고, 국내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에까지 유포되어 그곳 외교관에게도 우리나라에 관한 지침서가 되었다.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저서로 《신전자초방》·《동사록》이 있고, 편서로는 《통문관지》가 있다. 삼송신도시로 개발중인 오금동 하촌마을에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사대부 묘역임. 이 일대에 우봉김씨 묘역 수십기가 자리해 있으며 이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조 숙종대의 역관인 김지남의 묘소임. 현재 김지남의 묘역에는 비갈이 1기 세워져 있음. 비갈의 내용 중 김지남이 숙종대에 백두산에 올라 중국 청나라 사신들과 담판을 져서 그 영토를 명확히 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음. 왕조실록과 같은 문헌기록에는 백두산 정계비와 관련한 기록을 다수 볼 수 있으나 무덤의 비석중 정계비를 세웠다는 내용은 매우 드문 예임. 묘갈은 영조 11년(1735년)에 제작되었으며, 재질은 대리석이다. 내용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사실이 적시되어 있고 글씨체가 뚜렷하다.
2023/06/25, 고양문화원
[향토유산] 희옹공 이숙균 묘소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0호 지정일 : 2007. 8. 10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식사동 산158-1 - 조선 초의 문신으로 태조 6년(1397)에 출생하여 세종 30년(1448)에 사망하였고, 자는 균평, 본관은 단양으로 익평공 우의정 이무의 손자이다. 세종 5년(1423)에 외직을 맡아 많은 공을 세웠는데 특히 서방을 지키는 방책을 자주 올렸으며, 세종 8년(1426)에 광주 목사로 부임하였고 후에 강흥부사로 임명 되었으나, 임지에 나가기 전에 세상을 뜨므로 세종은 그의 공을 높이 여겨 가선대부한성판윤에 증직하고 예장 하였다. 시호은 희옹공 이다. 현재 개발중인 식사지구 공원 예정 부지내 위치함. 토지는 예전부터 타인의 소유였으며 현재 대한토지신탁주식회사 소유임. 봉분 앞에 상석과 비석, 2기의 문인석이 있음. 비석에는 「증가선대부한성판윤행정통대부삭방절도사 광주목사 단양이공휘숙균지묘」라 새겨져 있음. 가로 약4m, 세로 약5m 사각의 봉분으로 좌우의 문인석은 조선전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음
[향토유산] 희정공 성억 묘소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49호 지정일 : 2007. 8. 10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27번지 - 희정공 성억은 고려 우왕 12년(1386)에 태어나서 조선 세종 30년(1448)년에 돌아가셨으며 시호은 희정이다. 조선조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이며, 예조판서 석인의 아들이다. 음보로 관직에 나아가 공조정랑등을 역임하였다. 1414년에 군자부정, 공조판서, 전라도관찰사, 중추원판사 겸 병조 판서를 겸하고 좌찬성을 역임하였다. 공의 딸이 태종의 4자인 성녕대군에 출가 하였다. 묘는 유좌로 사각방정형의 호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경부인 죽산안씨와 정경부인 남양홍씨 3위 합봉. 규모는 가로 394㎝, 세로 530㎝, 높이 202㎝ 고려말 조선조 초기에 보이는 사각묘로 2단의 기단석이 봉분 전체를 둘러치고 있으며 기단석은 서로의 끝부분이 엇갈리게 쌓아져 봉분의 흘러내림을 막아주고 있음. 사각기단석에 다시 사각으로 작은 수로를 만든 것이 특이하며, 봉분의 앞으로는 혼유석, 상석, 고석이 배치되어 있다. 원비는 없어졌으며 2기의 문인석이 있음.
[향토유산] 동산동 비석군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47호 지정일 : 2001. 11. 1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동산동 10-2 고양밥할머니석상이 있는 동산동 창릉 모퉁이 공원에 있다. 북쪽에서부터 차례로 吳挺日淸德恤民善政碑와 德水慈氏橋碑銘, 嚴纘善政碑가 있다. 덕수자씨교비명은 조선 현종(1660)때 덕수교 다리를 만들면서 이 비를 세우게 된 배경, 공사기간, 사용경비, 그리고 도움을 준 사람 1000여 명의 인명을 이두 문자로 기록한 것이며, 吳挺日淸德恤民善政碑는 당시 관찰사였던 오정일의 공덕비이다. 그리고 엄찬은 숙종 16년(1690)부터 숙종 17년(1691)까지 고양군수를 지냈던 인물이다.
[향토유산] 고양 밥할머니 석상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46호 지정일 : 2006. 11. 1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동산동 10-2 ☆ 밥할머니 동산동 밥 할머니의 본래 성씨는 밀양박씨 (일부에서는 해주오씨)로 알려져 있다. 장성한 뒤 남평 문씨 문옥형(文玉亨)에게 출가하여 병자호란대에 크게 활약하는 외아들 문천립을 두었다. 조선조 선조대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양과 서울 은평구, 양주군 일대에서 의병과 관군에게 큰 도움을 주어 나라에 공적을 세우게 된다. 현재 고양지역에서는 이 밥 할머니가 행주대첩, 승리의 주역인 행주치마 부대의 여성 의병장으로 보고 있다. 당시 인조반정에 일부 참여하고 병자호란 전란으로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위해 구휼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외아들인 문천립은 어머니인 밥 할머니를 도와 공적을 더 했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연경에 볼모로 갔을 때 이들을 모신 공으로 하여 가선대부의 품계를 하사 받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밥 할머니는 국가로부터 받은 토지를 이용하여 많은 백성들의 빈민구제와 배고픔을 해결하는데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고양지역과 서울 은평구 지역에서는 밥 할머니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밥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묘소를 지금의 은평구 불광중학교 부근에 모시었다가 지금은 이장하여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조선조 후기 약사 보살상의 모습으로 세워진 여성의병장 밥 할머니의 석상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 보았을 때 대단한 배려 속에서 유지 되었다. 중국의 사신들과 고위관리들이 지나는 관서대로 , 한양의 입구에 세워진 이 밥 할머니의 위상은 매우 컸다. 그 후손들도 묘소 인근에 머물며 조상의 공적을 기렸다. 그러나 나라를 일제에게 강점당한 후 밥 할머니의 목 부분이 훼손되어 얼굴과 머리 부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마을 주민들은 이 머리부분을 새로 만들어 드리면 자꾸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고 옛 모습 그대로 있어야 민속, 문화적 가치가 높아 지금모습 그대로 모시고 있다고 전한다. 고양시에 있는 유일한 석불로 동산동 창릉 모퉁이 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2004년 12월 정비한 이 공원 내에는 현재 이 석상 이외에도 3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총 4기의 석물 중 가장 동북쪽에 위치한 밥할머니석상은 다른 석물과는 달리 북한산을 바라보며 45°정도 옆으로 세워져 있다. 석상의 옆에는 ‘동산동 밥할머니석상 이야기’라는 안내판이 있어 이 석상과 관련된 전설을 기록해두고 있다. 석상은 최근에 만들어진 대좌를 포함하여 총 높이 155.5㎝이고 현재 얼굴 부분이 소실된 상태이다. 석상의 팔목과 어깨 등은 매우 풍만하여 전체적으로 얇은 곡선들이 몸을 휘감은 듯 보인다. 수인의 경우 왼손은 施無畏印을 하고 오른손은 약함을 받치고 있다. 立像으로 생각되는데 무릎아래 부분이 결손되어 정확한 양상은 알 수 없다. 석상의 뒷면은 비교적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는데, 따로 광배를 만들어 받쳤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