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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유산] 이규령 묘비문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45호 지정일 : 2005. 7. 29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산42-4(임) 이규령은 회원군의 아들로 11세에 사망했다. 묘비의 설립연도는 1666년경이며 설립자는 선조대왕 손자 회원군이다. 묘와 묘비는 벽제동 영성군 이계묘의 앞에 있으며 단분으로 둘레석이 둘러져 있고 묘소에는 묘비 1기만 있다. 이 묘비는 여느 비석과는 달리 비석의 좌대와 비신이 분리되지 않은 채 통으로 깎아 만든 비석이다. 비문은 그의 부친인 회원군이 지었는데 여기에는 죽은 아들을 위해 제사 지낼 자산인 토지 매입, 사들인 노비, 제사 지낼 날짜, 제수품목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은 다른 보통의 비문과는 그 내용이 전혀 다른 문서의 형식으로 후면부터 시작된 내용은 11살이란 어린 나이에 죽은 외아들을 애도하면서 지은 유언으로 크게 5문단으로 나누어졌다.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에 자리한 회원군의 외아들 이규령의 비석은 산속에 자리해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다. 이 비문의 내용은 어떤 비석에도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을 가지고 있으니 광해군의 막내 아우인 영성군의 아들 회원군이 자신의 외아들인 이규령이 11살의 나이로 일찍 죽으니, 이를 슬퍼하며 세운 비문이다. 비의 재질은 양주 애석을 통째로 깎아 만들어 보기 드문 예로 평가 받고 있다. 먼저 비문의 앞 부분에는 어린나이에 죽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슬픔을 기술했고, 이어 아들이 살아생전에 가지고 있던 재물로 종들을 사들이고 밭과 논도 매입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다음에는 제사 지내는 정확한 날짜와 제사 지낼 때 사용되는 물품으로 꿩의 다리, 수박, 포도, 밤, 광어, 전복 등을 쓰라고 구체적으로 남겨 놓았다. 마지막 부분에는 자신 영성군이 죽더라도 후손과 종인들은 이러한 제사법을 계속 이어가길 당부하면서 비문을 마무리 짓는다.
2023/06/25, 고양문화원
[향토유산] 익령군 이치 묘소
P {MARGIN-TOP: 2px; MARGIN-BOTTOM: 2px}고양시 향토문화재 제44호 지정일 : 2005. 7. 29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산 144-10(임) ★ 익령군 [益寧君, 1422~1464] 태종의 여덟 번째 아들로 1422년(세종 4) 10월에 태종의 후궁인 선빈 안씨에게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평소 성품이 어질고 겸손했으며 학행이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인은 운봉 박씨(雲峰朴氏)와 평양 조씨(平壤趙氏) 두 명을 두었으며, 평양 조씨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아들을 얻었다.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의 중심 인물이었던 이원익(李元翼)의 4대조이며 시호는 소강공(昭剛公)이다. 1464년(세조 9) 7월 43세의 나이로 죽었다. 익령군(益寧君)이치 의 묘소는 덕양구 흥도동 관내 성사동 오리골 마을에 자리해 조선조 전기의 왕실 묘역으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묘역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묘 앞에는 조선전기 변형되기 이전의 장명등이 묘소를 지키고 있는데 6각의 모양인 고려시대의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화창(불구멍)이 2개이고 4각의 기둥도 당대의 모습이 그대로 남겨진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봉분 앞의 조선전기 비석에는 조선 세조 12년(1466)3월13일에 세웠다는 기록이 보인다. 묘소에는 묘비, 혼유석, 묘표, 상석, 장명등, 문인석 1쌍이 있다. 이 중 문인석은 조선조 전기의 특징을 갖춘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봉분 정면의 화강석 묘비는 세조 12년(1466) 3월 13일에 건립된 것으로 앞면에는 ‘太宗恭定大王子 益寧君 昭剛公之墓’라 기록되어 있다. 익령군은 조선 제3대 태종의 여덟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후궁 善嬪 安氏이다. 주변현황 : 묘소 앞 5m 지점으로 왕복4차선 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주변에 익령군 후손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음. 석물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특히 장명등이 8각인 점이 특이한 소중한 묘역이며, 부인의 묘소가 뒷편에 자리한 독특한 배치임. 조선조 전기 묘제연구 대상으로 그 가치가 큼.
2012-06-14, 고양문화원
[향토유산] 황치신 신도비 및 묘소
P {MARGIN-TOP: 2px; MARGIN-BOTTOM: 2px}고양시 향토문화재 제43호 지정일 : 1999. 2. 1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산72-1(임) ☆ 황치신 [黃致身, 1397~1484] 본관 장수(長水). 처음 이름 동(董). 자 맹충(孟忠). 시호 호안(胡安). 음보(蔭補)로 공안부부승(恭安府副丞)에 등용되고, 1415년(태종 15) 통례문 봉례랑(奉禮郞)을 거쳐 감찰·호조좌랑, 1432년(세종 14) 선공감판사(繕工監判事)·통례문판사 등을 역임, 1434년 동부승지에 올랐다. 이듬해 예조참의를 거쳐 중추원부사·한성부윤·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형조·공조의 참판을 거쳐 1444년 호조판서에 승진하였다. 1454년(단종 2) 중추원사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1457년(세조 3) 충청도병마절도사, 1461년 중추원판사가 되었으나 남의 노비를 빼앗은 혐의로 삭직되었다. 1466년 중추부동지사로 복관, 중추부판사에 이르렀고,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봉분은 호석이나 병풍석 없이 원형이며 봉분 오른쪽에는 묘비가 있는데 앞면에 ‘贈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右議政 兼領經筵事 兼春秋館事 行崇祿大夫 判中樞府事 諡胡安公 黃公之墓 貞敬夫人 黃氏之墓’라 새겨져 있다. 묘소 아래 100m 지점에는 대좌·비신·이수로 이루어진 신도비가 위치하며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묘는 구파발에서 의정부 방향으로 이어진 63번 지방도로 좌측의 지축동 중고개 마을에 위치하며 貞敬夫人 황씨 묘와 하나의 봉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묘소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묘비, 문인석 1쌍이 있다.
[향토유산] 도내동 이석탄 장대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9호 지정일 : 1999. 2. 1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48-1(전) ☆ 도내동의 유래 도내동은 임진왜란 때 이석탄 장군이 도내리 뒷산에서 아군이 많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군사 100여 명을 데리고 며칠 동안 계속해서 산을 돌았다는 전설에서 도래울이라고 하다가 훗날 도내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 이신의 [李愼儀, 1551~1627]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 향군을 거느리고 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려는 데 대해 항소를 올렸다 유배되었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형조참의·형조참판을 지냈다.《석탄문집》이 있다. 본관 전의(全義). 자 경칙(景則). 호 석탄(石灘). 시호 문정(文貞). 1582년(선조 15)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예빈시 봉사(禮賓寺奉事)가 되고 1584년 참봉, 이어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향군(鄕軍) 300을 거느리고 적과 싸워 공을 세우고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이 되었다. 공조좌랑 ·고부군수(古阜郡守)를 거쳐 1604년 임천군수(林川郡守), 이어 남원부사(南原府使), 홍주(洪州) ·해주(海州)의 목사를 지냈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려는 데 대해 항소(抗疏)를 올렸다가 회령(會寧)에 유배되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1627년(인조 5) 형조참의 ·형조참판을 역임했다. 같은 해 정묘호란으로 왕을 호종하여 강화로 가던 도중 수원에서 병사했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집에 《석탄문집(石灘文集)》이 있다. 도내동 흥도초등학교에서 창릉천으로 연결된 도라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장대비이다. 현재 장대의 주위에는 다른 묘나 비는 보이지 않으며 산을 깎아 터를 만들어 잘 보존되어 있다. 장대비는 화강석으로 5㎝의 기단과 비신이 합쳐진 1기이며 옥개석과 비두는 만들지 않고 윗부분이 아랫부분보다 약간 넓은 모양을 하고 있다. 비의 앞면에는 ‘李石灘將臺’라 표기되어 있으면 뒷면에는 ‘先生壬辰起義兵設臺 後百四十九 年庚申 洞人立’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아 이 장대가 세워진 곳이 石灘 李愼儀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접전을 벌인 장소임을 알 수 있으며 1740년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석탄 이신의(1551~1627)는 高陽八賢의 한 분으로 본관은 전의이다.
[향토유산] 성사동 권희선생묘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8호 지정일 : 1999. 2. 1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산60-6(임) 권희(1319~1405)는 고려말 조선조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으로 檢校侍中 權皐의 아들이며 조선조 전기의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陽村 權近의 아버지가 된다. 주청부사로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황해도 · 충청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강화유수 · 금산군수 등을 두루 거친 뒤 광주목사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왕실의 신주를 안전히 모신 공으로 자헌대부에 올랐다 본관 안동. 자 사열(思悅). 호 남악(南岳). 중추부동지사 상(常)의 아들. 1568년(선조 1) 진사가 되고, 158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가 주서(注書) ·전적(典籍)을 거쳐, 각 조(曹)의 낭관(郞官)을 지내고 양사(兩司)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592년 종묘서령(宗廟署令)이 되고, 그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평안도로 피난할 때 역대 왕의 신주(神主)와 어보(御寶)를 안전히 모시고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하였다. 1596년 종부시정겸집의(宗簿寺正兼執義)로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호조 ·예조 ·형조의 참판(參判)을 지냈다. 1603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황해도 ·충청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강화유수(江華留守) ·금산군수(錦山郡守) 등을 두루 거친 뒤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왕실의 신주를 안전히 모신 공으로, 1624년(인조 2)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호성(扈聖) ·선무(宣武)의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봉분 앞에 세워진 묘비는 윗부분을 다듬어 마름모꼴로 만들어 세웠고 앞면에는 ‘朝鮮政丞靖簡公 權僖之墓 辰韓國大夫人 韓氏부葬’이라 표기되어있다. 또한 장명등은 화창이 두개로 옥개석의 조각수법이 뛰어난 작품이며 구조는 사각의 火舍石위에 사각형 옥개석을 얹은 형태이다. 문인석은 조선 전기의 일반적인 형식인데 전체적으로 몸에 비해 머리가 크며 땅속에 묻힌 부분과 아래쪽이 왜소해지는 점이 특징이다. 묘는 원당 전철역 남쪽의 성사동 불당골 마을 안에 辰韓國大夫人韓氏와 합장되어 위치하고 있다. 묘소에는 묘비, 장명등, 상석, 고석, 향로석, 문인석 2쌍이 있으며 최근에 오석의 비석과 망주석 1쌍, 문인석 2쌍을 그 앞쪽에 갖추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