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의 충실한 문화지킴이 고양문화원
[향토유산] 기준선생묘 및 신도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17호 지정일 : 1986.6.16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산54(임) 기준(1492~1521)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중(敬仲)이며 호는 복재(服齋), 덕양(德陽)이며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응교(應敎) 기찬(奇襸)의 아들이며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중종 9년(154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을 거쳐 홍문관(弘文館) 정자로 초계 문신(抄啓文臣)이 되었고 사가독서를 하였다. 중종 11년(1516) 천문 예습관(天文隸習官)을 겸했고 검토관(檢討官), 수찬을 지낸 후 검상(檢祥), 장령(掌令), 시강관(侍講官)을 거쳐 1519년 응교(應敎)가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온성(穩城)에 유배되었다.이듬해 모친상으로 고향에 돌아갔다가 다시 유배지에 가서 교살(絞殺)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온성의 충곡서원, 아산의 아산서원(牙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에서 각각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묘는 원당 전철역에서 한양골프장 방향인 성사동 사근절 마을 뒤편에 서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현재 봉분은 정부인 파평 尹氏와 합장된 단묘로 이루어져 있다. ‘服齋先生奇遵之墓 贈貞夫人 尹氏 부左’라고 쓴 묘비는 1962년 4월에 세운 것이다. 기준(1492~1521)은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敬仲이며 본관은 幸州이다. 고양 8현의 한 사람으로 저서로는 『德陽遺稿』,『戊寅記聞』,『德陽日記』가 있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과 망주석, 문인석, 1쌍 및 최근 세워진 동자석 1쌍과 동물석 등이 갖추어져 있다.
2023/06/25, 고양문화원
[향토유산] 이지신선생묘 및 신도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16호 지정일 : 1986.6.16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 산270-4(임) 이지신(1512~158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元立이며 호는 보眞菴이다. 본관은 牛峰으로 판서 李承健의 손자이며 李諶의 아들이다. 묘는 용두동에서 향동동 방향으로 이어진 60번 지방도로 향골마을에 서남향으로 위치하며 봉분은 단분으로 되어 있다. 묘 앞 중앙에는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묘비가 있다. 묘소 앞 150m 지점 아래에 위치한 신도비는 현종 3년(1662)에 건립한 것이다. 앞면에는 ‘黃海道 觀察使 贈吏曹判書 李公神道碑’라 전자되어 있다. 묘소에는 상석, 향로석 그리고 좌우에는 문인석, 동자석, 망주석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현재 약간 기울어져 있으며 장방형의 비좌와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갖추었고 비신의 규모는 높이 203㎝, 너비 94㎝, 두께 44㎝이다.
[향토유산] 유여림선생묘 및 신도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15호 지정일 : 1986.6.16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산73-3(임) 묘는 가장동 삼거리에서 고양동마을 방향으로 이어진 76번 도로로 약 300m 가량 들어가 위치한 두포동 마을에 남향하여 창녕 성씨의 묘와 쌍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묘비는 원래 조선 중종 28년(1543) 8월에 건립되었으나 1935년 9월에 다시 세운 것으로 烏石으로 되어있다. 묘소 앞 100m 지점에 위치한 대리석의 신도비는 선조 19년(1586)에 세운 것으로 이수와 기단을 갖추고 있다. 유여림(1476~1538)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啓沃, 호는 政堂이다. 본관은 杞溪이며 僉知中樞府事 起昌의 아들이다. 묘소에는 묘비, 장명등, 상석,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이 갖추어져 있다. 쌍분의 총 둘레는 각 8m씩이며 높이는 2.5m이다. 묘비는 규모가 너비 50㎝, 두께 20㎝, 높이가 120㎝이다. 신도비는 규모는 높이가 200㎝, 너비 90㎝, 두께 24㎝이다. 현재 비신의 중간부분은 크게 금이 가 있고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하여 글자를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향토유산] 이신의선생묘 및 신도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14호 지정일 : 1986.6.16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산32(임) 이신의(1551~1627)는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景則이며 호는 石灘이다. 본관은 全義로서 參議 李元孫의 아들이다. 묘는 고양시청에서 화전방향으로 이어진 69번 지방도로 도내동 서촌마을 입구인 도래울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묘는 貞夫人 慶州 李氏의 묘와 쌍분으로 되어 있다. 묘 앞 50m지점에 위치한 신도비는 4면 刻字로 앞면 상단에 ‘贈吏曹判書 文貞公 石灘 李先生 神道碑銘’이라 篆字되어있다. 비문은 尤庵 宋時烈이 지었고 尹用求가 追書했으며 金漢이 追篆하였다. 옥개가 갖추어진 비의 규모는 높이 160㎝, 너비 56㎝, 두께 27㎝이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과 망주석, 문인석 각 1쌍이 있는데 대부분 최근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묘 좌측의 대리석 묘비는 영조 25년(1749) 7월에 건립한 것으로 높이 250㎝, 너비 60㎝, 두께 20㎝의 규모이며 비좌와 팔작지붕의 옥개를 갖추고 있다.
[향토유산] 홍이상선생묘 및 신도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13호 지정일 : 1986.6.16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산56-1(임) 묘는 성석동 성동마을의 풍산홍씨묘역에 위치하고 있다. 貞敬夫人 安東 金氏의 봉분과 쌍분이다. 신도비는 인조 8년(1630)에 건립하였다. 현재 화강석의 귀부는 작은 평형으로 마멸이 심하며 이수는 조각이 정교하고 뚜렷하다. 홍이상(1549~1615)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처음 이름은 麟祥이며 자는 元禮, 또는 君瑞이다. 호는 慕堂이며 본관은 풍산으로 洪修의 아들이다. 高陽八賢의 한 사람으로 문봉서원에 제향되어 있다. 쌍분으로 묘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이 있으며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 주위로는 둘레석이 쳐져있으며 봉분 앞에는 높이 170㎝, 너비 65㎝, 두께 25㎝ 규모의 묘비가 있다. 신도비는 묘소 아래 약 150m 아래 지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