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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민속제] 용강서원 봉향제

작성자 : 고양문화원 날짜 : 23/06/25 22:23 조회 :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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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서구 일산동에서 봉일천으로 향해 중산마을 끝 언덕 개미고개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서 논틀건너를 보면 북쪽으로 뻗은 산맥이 보이는데 이 산의 이름이 황룡산이다. 고봉산과 마주한 이 산줄기 삼태안 같은 아래 동네가 성석동 윗감내(상감천)라고 불리는 마을이다. 황룡산 밑 마을 중간에는 기와지붕을 한 전각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용강서원(龍江書院)이다.
이 서원은 본래 함경도 용릉강변에 있는 것인데, 6 ? 25에 의해 남북이 분단됨에 따라 서원에 제향을 할 수 없게 되자 안타깝게 생각한 박씨 문중과 당시 고양군의 유림에서 재건을 발의하고 모금하여, 군과 도의 지원을 받아서 1979년~1980년에 이곳에 다시 짓게 되었다. 이곳에 짓게 된 이유는 이곳에 제향을 모시는 분 중 박순(朴淳)의 부인 장흥 임씨가 박순선생이 함흥에 차사(差使)로 갔다가 죽음의 참변을 당하자 ‘지아비를 죽게한 박덕한 여인이 죽음으로써 지아비를 따름이 옳다.’고 하며 순절하니 태종이 열녀문과 더불어 묘를 쓸 산을 하사하였으니, 황룡산이 바로 그 땅이다. 그런 연유로 이곳에 용강서원을 재건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고려말 충신 충정공(忠靖公) 박서(朴犀)와 이조 영조때 문신 조상경(趙尙絅)과 이조 개국공신 함흥차사 박순(朴淳) 세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고 있다. 이곳의 제향은 해마다 음력 3월 16일과 9월 16일 두 번에 걸쳐 고양시 유림과 전국에서 초청된 유림이 올리고 있다. 이곳에서 제향을 받으시는 분들을 소개드린다.
▶충정공(忠靖公) 박서(박서)

충정은 시호로 고려 고종 때의 무신이다. 고종 18년(1231) 공이 서북면 병마사의 직책으로 구주의 성을 수호하고 있을 때, 위세를 떨치던 몽고군이 성으로 쳐들어와 이중 삼중의 포위을 치고 밤과 낮을 구별하지 않는 무차별공격을 퍼부었다. 공은 이런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지금의 게릴라식 전술로써 적군의 이동로를 급습하여 돌격전을 펼치고 누차(樓車)나 목상(木床)에 소가죽을 씌워 그 속에 군사를 숨겨 적의 눈을 교란하는 등 여러 가지 수법을 이용하여 적의 무리에 치명상을 입혔다. 이에 몽고군은 빈번한 패전에 큰 피해를 입고 작전을 변경하여 급기야 진로를 개성으로 돌려 함락하고 고종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고종을 협박하여 구주성의 항복을 명하도록 하였다. 이에 고종은 어쩔 수 없이 감찰어사 민희를 구주로 보내어 항복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공은 완강히 거절하며 말을 듣지 않았다. 네 차례나 깨우치는 말을 했으나 듣지 않자 민희는 분하여 칼을 뽑아 자결하려 했다. 이에 공은 ‘어명을 어길 수 없어 항복 할 수 밖에 없습니다.’하고 눈물을 주르르 쏟으며 그제서야 항복하고 말았다 한다. 한편 몽고장수는 성을 둘러보며 감탄하기를 ‘내가 종군하여 70세가 되도록 천하의 성지와 전투하는 상황을 보았으나 이와 같이 훌륭히 하고 끝내 항복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하였다. 이 성중의 모든 장수들은 뒷날 명장이나 재상이 되리라.’ 하였다. 과연 박서는 문하평장서(정2품의 벼슬)를 제수받았다. 선생의 의기와 의지와 위엄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충민공(忠愍公) 박순(朴淳)

공의 본관은 충북 음성으로, 시호는 충민이다. 이성계(이조 태조)의 부하로서 요동정벌 행차시 종군하였다. 고려군사가 압록강을 건넜을 때 심한 폭우로 물이 범람하게 되니 군사의 정황은 몹시 뒤숭숭하였다. 따라서 이성계는 천시의 순리가 합당하지 않으니 회군할 것을 개성의 조정에 품신하는 구실을 갖기에 이르렀다. 공을 신임하고 중히 여긴 이성계는 공으로 하여금 품신의 글을 가지고 조정(우왕)에 가게 하는 충복으로 삼았다. 이에 이씨 왕조가 개국하였을 때 태조 이성계는 공에 대한 능력인정과 신임으로 상장군의 직위를 내려준다.
한편, 방원이 형제의 난을 일으켜 이복 동생들을 죽이고 결국 제 3대 임금 태종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 오르고 보니 부친 태조에 대한 불효심과 더불어 왕으로서 행세를 할 수 있는 ‘옥쇄’도 부왕으로부터 받아야 할 사정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부왕의 환심을 사고자 하여 문안을 올리는 차사를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함흥으로 보내는 차사는 보내는 대로 황천객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가를 모신 신하들이 태종의 조정을 원망하여 저지르는 참상이었다. 함흥에 차사로 가는 것은 곧 죽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니 소식이 없으면 ‘함흥차사’라는 은어가 생겨나게 될 지경이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함흥에 왕의 차사로 가는 것을 피하려 했다. 결국 어전회의가 열리고 모두들 왕과 눈길이 부딪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와중 늙은 대신 박순공이 그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태종으로 하여금 개국공신의 충성심에 다시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런데 공은 임금에게 새끼 딸린 어미소와 함게 떠날 수 있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공은 태조 처소로의 행차에 아무도 따르지 못하게 한 채 새끼딸린 어미소만을 데리고 이동하게 되었다.
 태조의 처소로 가려면 ‘용흥강’을 건너야만 했는데 박순공은 송아지를 강가에 메어두고 어미소만 강을 건너게 하여 그 꼬리를 잡고 강을 건너갔다. 결국 평범한 농부의 모습으로 자신이 차사임을 감추게된 박순공은 무사히 태조의 처소에 도착하여 옛 막료를 만나 새삼 감회에 젖어 있는 태조에게 데리고온 어미소가 자식을 찾는 애틋한 울음소리를 들려주며 간곡히 상소하기를 ‘태상마마! 미물도 서로의 정감이 저러하거늘 태상마마와 저하의 애끓는 그리움이야 말 할 바가 아닐 줄 아옵니다. 태상마마! 저하께서는 태상마마에 대한 그리움 애끓는 줄 아옵니다. 환궁하심을 통촉하오소서...!’ 하며 복배하니 태조는 아련한 정감에 어려 ‘공은 빨리 가라’ 하였다.
그러나 공이 행장을 수습하여 용흥강변에 다다랐을 때에 신하들의 강력한 요청에 어쩔 수 없이 보내어온 태조의 사자로 인하여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죽기 전 박순공은 태상마마께 도리를 다하게 해달라는 청을 하였는데 태조의 행재를 향해 4배를 올리며 ‘신은 죽거니와 다만 앞에 말씀하신 교시를 바꾸지 마시기를 원합니다.’하니 후에 이 말을 전해들은 태조는 ‘박순은 내가 젊었을 때의 어진 벗이다. 나는 전번의 말을 잊지 않겠노라’고 중얼거렸다 한다.
그러나 태조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박순공의 죽음을 윤허하면서 ‘만일 강을 건넜거든 절대 쫓지 말지어다’라는 조건을 덧붙임으로서 옛 벗에 대한 남다를 정을 내비쳤으며 촌각의 시간차로 운명을 달리한 박순공의 죽음에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 한편 부인 장흥 임씨는 고려 때 대사헌의 딸로서 공이 함흥으로 가던 날부터 밤낮으로 평안을 기구하였으나, 끝내 흉한 소식을 듣게되자 ‘지아비를 비명에 가시게 한 박덕한 여인이 살아서는 안되는 일이라, 내 남편의 뒤를 따르리라’하고 순절했다 한다.
후에 공과 장흥 임씨의 비보를 들은 태종은 충신과 열녀의 문을 세워 정표를 세우도록 명하고 공을 돈독히 추모하고 대대로 자손의 등용을 폐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한다. 그리고 부인에게 묘지를 주어 예를 다해 장례를 치루게 했으니 그 묘지가 지금의 고양시 일산구 성석동(윗감내)의 황룡산에 있다.


▶경헌(景獻) 조상경(趙尙絅)

본관은 풍양으로 숙종(1681)~영조(1746)때의 문신이다. 경헌은 시호이다.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숙종 36년에 문과에 급제를 한 후 성품이 정의롭고 강직하며 올곧은 마음으로 인해 온갖 모함과 무고로 귀양살이와 등용을 거듭하였으니, 경종~영조시대에 걸쳐 40여년의 조정생활에서 병조판서 4번, 이조판서 5번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