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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재] 한계미선생묘 및 신도비

작성자 : 고양문화원 날짜 : 23/06/25 22:09 조회 : 3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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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향토문화재 제21호

지정일 : 1986.6.16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산77-5(임)

 

 

한계미(1412~1471)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언니와 결혼하였다. 세종 20년(1438) 음보(蔭補)로 사용(司勇)이 되고 그 후 나주 판관(羅州判官), 형조도관좌랑(形曺都官左郞) 등을 역임하였다. 문종2년(1452)에 사은사(謝恩使)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5년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자 좌익공신(左翼功臣) 3등으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가 되고 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형조, 호조의 참판사로 부임하고 이시애(李施愛)의 반란 때 평안도의 정병을 이끌고 가서 평정에 힘써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으로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 이어 좌찬성(左贊成)으로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성종 1년(1470)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진봉되고 이듬해 좌리공신(左理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시호는 문양(文襄祠)가 건립되어 있다.

 

묘는 관산동 시묘골 마을의 청주한씨묘역에 위치하며 왼쪽에 파평윤씨가 합장되어있는 단묘이다. 우측에는 1972년에 건립한 묘비가 있고 봉분 앞 중앙에는 당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백대리석 묘비가 세워져있다. 한계미선생의 신도비는 묘소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종2년(1471) 12월에 세운 것으로 이수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었다. 비각은 최근 새로 지었다. 한계미(1421~1471)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公甫, 본관은 淸州로서 관찰사 惠의 아들이다.

 

묘소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묘비, 망주석과 문인석 1쌍이 있는데 상석과 망주석, 장명등은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다. 묘소 주위에는 후대에 두른 화강암 재질의 호석이 둘러져있으며 봉분의 둘레는 총 28m이고 높이가 2m이다.

신도비의 크기는 총 높이 230㎝, 너비 66㎝, 두께 21㎝이다.